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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zine No.48 | 제19권 2호 <통권72호>
2026년 여름호 대한내분비학회 웹진Webzine No.48 | 제19권 2호 <통권72호>
2026년 여름호 대한내분비학회 웹진
유형준 전 한림의대 교수, 시인
변성기 전 어린 소년의 고환을 거세하여 카스트라토(castrato)를 만들었다. 근대 내분비학이 정립되기 전인 17~18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상황이다. 당시 교회나 오페라 무대에선 여성의 활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여성의 목소리를 낼 성인 남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신체적 거세를 통해 예술적 영생을 얻으려 했던 인간의 욕망과 비극. 거세된 남성성과 평범한 삶. 호르몬이 인간의 운명과 예술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잔혹한 인문학적 사례다.
진료실에서 내분비 의사는 호르몬 수치를 본다. 수치들은 언제나 정직하다. 거세는 단순한 제거가 아니다. 기대했던 대로 테스토스테론은 더없이 낮아지고, 변동성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하나의 축을 재설정하는 일이다. 내분비계의 미세한 조율 속에서, 인간의 리듬은 조용히 바뀐다. 밤과 낮의 농도가 달라지고, 충동의 진폭이 줄어들며, 감정의 파형이 낮아진다. 의학은 그 변화를 그래프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그래프 바깥의 침묵까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카스트라토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새로운 축으로 조정된 몸이다. 사춘기 이전에 개입된 단 한 번의 결정이, 내분비계의 시간을 멈추고 방향을 바꾼다. 테스토스테론의 급격한 상승은 유예되고, 후두는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채 남는다. 그 대신 폐활량은 성인의 크기로 확장되고, 공명은 기이할 만큼 넓어진다. 의학적으로 보자면 이는 결핍과 보상의 기묘한 공존이다. 억제된 축과 과장된 기능이 한 몸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상태다. 그러나 이 조정은 단지 생리적 변형에 그치지 않는다. 내분비적 균형이 재편되는 순간, 인간의 정체성 또한 다른 궤도로 진입한다. 남성으로 완결되지도, 그렇다고 소년으로 남아 있지도 않은 중간 상태.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는 바로 그 경계에서 발생한다.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성(性), 그러나 누구보다 강렬하게 발화되는 음성. 기구한 ‘호르몬 서사’다. 테스토스테론의 부재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시간의 지연이며, 성장의 방향 수정이다. 일반적인 내분비의 흐름이 직선적이라면, 카스트라토의 몸은 그 선을 굽히고, 되돌리고, 우회한다. 그 결과로 생성된 목소리는 자연의 것이 아니라, 의도된 자연, 혹은 설계된 생리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인위적 개입이 오히려 ‘천상의 소리’로 찬미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서 인간을 넘어선 어떤 순수성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순수성은 결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거와 억제, 그리고 선택의 결과다. 다시 말해, 가장 인위적인 조작이 가장 초월적인 것으로 인식된 역설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개인의 것인가, 아니면 그를 그렇게 만든 사회의 것인가. 내분비적 개입은 개인의 신체에 가해졌지만, 그 결과물은 집단의 욕망에 봉사한다. 가장 높은 음역, 가장 맑은 공명, 가장 오래 지속되는 호흡, 심지어 천상의 소리. 그것들은 모두 타자의 기대로 규정된 극도의 표현 가치들이다.
내분비 의사의 시선으로 볼 때, 카스트라토는 균형의 파괴를 통해 얻은 새로운 균형이다. 정상 범위를 벗어난 상태가, 다른 차원의 정상으로 재구성된 사례. 우리는 이를 병리로 부를 수도 있고, 기능적 특이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그 몸이 단순히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분비학은 단순히 호르몬의 수치를 다루는 과학을 넘어, 인간의 성장, 욕망, 노화, 그리고 정체성을 다룬다. 보이지 않는 호르몬이, 보이는 인간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고 변주하는지 탐구한다. 지나침은 덜어내고 결핍은 채우며, 적정함을 지향하는 균형의 학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모두 정교한 수치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어떤 삶은 과잉 속에서 빛났고, 어떤 존재는 불균형 속에서 자신을 증명해 왔다. 바로 여기에, 내분비학이 깊은 문학적 서사를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시인(필명 유담), 수필가. 한림의대 내분비내과 및 의료인문학 교수, 대한당뇨병학회장, 대한비만학회장, 대한노인병학회장, 대한의료커뮤니케이션학회장. 한국의사시인회 초대회장, 문학청춘작가회장, 한국의사수필가협회장, 함춘문예회장, 의료와 예술 연구회장. 현재. 씨엠병원 내분비내과장. 쉼표문학회 고문, 의학과 문학 접경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