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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zine No.47 | 제19권 1호 <통권71호>
2026년 봄호 대한내분비학회 웹진Webzine No.47 | 제19권 1호 <통권71호>
2026년 봄호 대한내분비학회 웹진
유형준 CM병원
“호르몬은 분자이며, 물질이며, 보이지 않는다.
무작위로 흐르며, 몸을 감지하는 그물망, 이미지가 아닌.”
장편 산문시 『내분비학』의 머리 부분이다. 현대 미국 시단에서 가장 독창적인 목소리를 지닌 시인 중 한 명인 메이메이 베르센브루게(Mei-mei Berssenbrugge, 1945~ )[그림]의 시다.
『내분비학』은 내분비학을 문학적으로 탐구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분비계는 메시지들의 체계이고, 호르몬이라는 이름의 메시지들은 혈류를 타고 아득히 먼 장기들로 여행을 떠난다. 이는 물질적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물망 같은 네트워크로 이어진 소통이다. 즉, 몸 안의 내분비계는 이미지가 아닌 실체인 기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이며, 그 기호들 또한 몸이다.”
그녀는 중국 베이징에서 네덜란드 이민자 출신의 미국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성장하며 동서양의 철학과 문화를 동시에 흡수했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두 차례 미국 도서상을 수상했고, 2026년엔 시 분야에서 뛰어난 평생 업적을 인정받아 프로스트 메달 (Frost Medal)을 받았다. 이 메달은 미국시인협회가, 「가지 않은 길」로 널리 알려진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정한 상이다.
베르센브루게 밖에도, 내분비학 분야를 소재나 주제로 시를 발표한 문인은 여럿 있다. 내과 전문의이자 하버드대 교수 라파엘 캄포(Rafael Campo), 내분비학 지식을 시적 특성과 결합한 내분비 전문의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와 사마르 말라엡(Samar Malaeb) 등을 들 수 있다.
시인들은 왜 내분비학에 귀 기울일까?
우선, 내분비학은 혈액을 통해 세포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전하는,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신호인 호르몬을 대상으로 한다. 호르몬은 인간의 생식과 탄생, 성장과 늙음, 사랑과 미움, 기쁨과 분노, 스트레스와 휴식, 수면과 꿈 등의, 어쩌면 원초적 경험을 조율하며 변화시킨다. 호르몬이 속삭이며 자아내는 이러한 변화와 현상이 점철(點綴)된 삶의 서사를, 마치 시가 소리 없는 운율로 감정을 조용히 노래하듯, 그러나 깊게, 다루는 학문이 내분비학이다. 마치 시가 독자에게 숨겨진 메시지를 시어(詩語)에 담아 전달하는 것과 같다.
또한 특정 분비샘에서 분비된 호르몬이, 특정 수용체를 찾아 이동하여, 변화를 일으킨다. 마치 시인의 마음에서 출발한 심상(心象)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독자의 가슴 깊숙한 곳에 깃든 수용체로 스며들어 감정적 또는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듯이.
아울러 내분비학이 연구하는 호르몬 분비의 리듬에 따른 항상성은, 시의 은밀한 운율이 낳는 생명의 파동과 닿아 있다. 예를 들면, 장기간의 스트레스와 슬픔에 초점을 맞춘 애가(哀歌)에서 느껴지는 끈질긴 통증은, 코르티솔의 오랜 기간 상승이 드러내는 내분비학적 변화를 문학적으로 은유한 표현이다.
이처럼 시적이고 철학적인 내분비계의 그물망을 오가는 보이지 않는 신호의 중얼거림이나 소곤거림을 귀담아들은 시인-특히 의사가 아닌 베르센부르게-에 의해 속삭임은 시로 승화하였다.
글을 맺으며, 의학과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내분비의 속삭임을 경청(傾聽)한, 메이메이 베르센브루게가 미국의 유명한 예술 문화 잡지 《BOMB》와 인터뷰한 내용 중 한 대목을 옮긴다.
“이런저런 사물들을 가르는 경계를 없앰으로써, 사유와 글쓰기의 지평을 넓히려 애쓰고 있습니다. <중략> 돌이켜보면, 나의 시는 모두 친밀한 목소리로 쓴 것이고, 또한 그 목소리는 경계를 없애는 도구입니다.”
시인(필명 유담), 수필가. 한림의대 내분비내과 및 의료인문학 교수, 대한당뇨병학 회장, 대한비만학회장, 대한노인병학회장, 대한의료커뮤니케이션학회장. 한국의사시인회 초대 회장, 문학청춘작가회장, 의료와 예술 연구회장. 현재. 씨엠병원 내분비내 과장. 함춘문예회장, 쉼표문학회 고문, 한국의사수필가협회장, 의학과 문학 의 접경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