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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zine No.49 | 제19권 3호 <통권73호>
2026년 가을호 대한내분비학회 웹진Webzine No.49 | 제19권 3호 <통권73호>
2026년 가을호 대한내분비학회 웹진
박이병 가천대학교 길병원 내분비대사내과
한 달 전, 저는 굉장한 클래식 공연을 감상했습니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4부작 하이라이트 공연입니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는 알고 계시죠? 아마 대부분 한 편쯤은 보셨을 것 같습니다. 그저 보잘것없이 보이는 반지를 둘러싸고 선과 악이 대결하고, 수많은 인물들이 반지의 힘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한 번쯤 “이 반지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 답을 찾아가는 흥미로운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반지 시리즈는 어떤 의미이고 이게 왜 지금 클래식음악계 화두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는 보통 하나의 오페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네 편의 음악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작품이다.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의 네 작품을 모두 공연하면 15시간이 훌쩍 넘는다. 중간 휴식까지 포함하면 며칠에 걸쳐 보아야 할 정도다. 그래서 바그너의 <반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 같다. 작품 전체를 여러 번 보고, 등장인물과 신화의 계보를 외우고, 각각의 음악이 등장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바그너리안(Wagnerian)’이라고 불리는 열성적인 팬들이다.
저도 오래전 클래식 음악에 한창 빠져 있을 때 <반지> 전편을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 압구정에 있던 ‘클래식바움’이라는 장소에서 해설을 들으며 4번에 걸쳐 영상으로 전편을 보았다. 워낙 방대한 작품이라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작품의 배경과 줄거리를 설명해주는 가운데 보니 의외로 재미있게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대부분의 시간을 졸았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리고 세월이 꽤 흐른 얼마 전, 다시 <반지>를 만났다. 이번에는 영상이 아니라 실제 공연장에서였다. 마침 직장과 가까운 부천아트센터에서 <니벨룽의 반지> 4부작 하이라이트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좋은 자리부터 서둘러 표를 샀다. 15시간이 넘는 전편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지만, 약 4시간에 걸쳐 핵심 장면들을 음악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컸다.
공연은 거의 4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여러 성악가들이 등장했고, 콘서트 형식의 공연이었지만 음악만 듣는 느낌은 아니었다. 특히 바리톤 사무엘 윤(Samuel Youn)의 존재감이 인상적이었다. 독일어권에서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궁정가수(Kammersänger) 칭호를 받은 그는 무대 장치가 거의 없는 콘서트 형식인데도 마치 실제 오페라 무대에 서 있는 것처럼 노래하고 연기했다. 다른 가수들이 일부 악보를 보며 노래하는 모습도 있었지만, 사무엘 윤은 거의 악보에 의존하지 않는 듯했고,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전달했다. 순간적으로 ‘지금 나는 콘서트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페라 무대에 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날 모든 것이 굉장했다. 아드리앙 페뤼송의 지휘와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향도 그랬고, 성악가들의 힘 있는 목소리도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그너의 음악 자체가 주는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순간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발퀴레>의 ‘발퀴레의 기행’이다.
“호요토호! 호요토호!”
오케스트라가 힘차게 몰아붙이는 순간, 정말로 발퀴레들이 하늘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듯했다. 음악이 앞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나를 둘러싸고 밀려오는 것 같았다. 마치 발퀴레들이 내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몇 번이나 “브라보!”를 외쳤는지 모른다. ‘발퀴레의 기행’이 어떤 곡인지 한번 들어보면 누구나 알 만한 곡이다.
그런데 이렇게 강렬한 음악을 듣고 있으면 궁금해진다. 도대체 바그너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거대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니벨룽의 반지>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단순한 하나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라인강의 황금을 빼앗고, 그것으로 반지를 만든다. 그런데 이 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다.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절대적인 권력의 상징이다. 문제는 그 반지를 가지려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스토리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라인강의 황금에서 비롯된 절대반지를 둘러싸고 신, 난쟁이족, 인간, 거인족이 얽히며 권력과 저주, 배신과 파멸로 치닫는 4부작의 서사. 전체 흐름은 황금의 탈취와 반지 제작, 보탄의 계약과 갈등, 지크프리트의 영웅적 행보, 그리고 마지막에 반지와 신들의 세계가 함께 종말을 맞는 구조로 요약된다.’
이렇게 압축하면 <니벨룽의 반지>의 이야기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황금 → 반지 → 권력 → 욕망 → 저주 → 파멸.
그런데 ‘반지’라는 이야기는 바그너나 톨킨이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훨씬 오래전 북유럽 신화에도 저주받은 황금반지가 등장한다. 난쟁이 안드바리가 가지고 있던 ‘안드바라나우트(Andvaranaut)’라는 반지는 저주와 함께 전해졌고, 이후 그 반지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죽음과 파멸이 이어진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역시 이러한 북유럽과 게르만 전승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고 보면 수백 년, 수천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도 이야기는 묘하게 반복된다. 황금, 반지, 욕망, 저주, 그리고 파멸. 인간이 가진 욕망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지의 제왕> 역시 ‘절대적인 힘을 가진 반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두 작품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J. R. R. 톨킨이 바그너의 <반지>를 그대로 가져와 <반지의 제왕>을 쓴 것은 아니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시대와 작가의 작품이고, 이야기의 구성도 상당히 다르다. 다만 두 작품 모두 북유럽과 게르만 지역에 전해 내려오던 오래된 신화와 전설이라는 거대한 원천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반지’라는 물건이 두 작품에서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순히 갖고 싶은 물건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상징한다. 반지를 얻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그 순간부터 반지가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작품의 하이라이트 연주회는 저에게 벅찬 감동을 준 거 같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국립오페라단이 올해부터 4년에 걸쳐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편을 무대에 올리는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2026년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2027년 <발퀴레>, 2028년 <지크프리트>, 2029년 <신들의 황혼>까지 이어지는 여정이다. 한 해에 전편을 몰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1년에 한 작품씩 4년에 걸쳐 만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꽤 멋진 방식이다. 올해 <라인의 황금>을 보고, 내년에는 <발퀴레>를 기다리고, 다시 <지크프리트>를 거쳐 2029년 마침내 <신들의 황혼>에 도착한다.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대하소설을 4년에 걸쳐 한 장씩 읽어가는 것 같아 무척 기대된다.
특히 올해 공연되는 <라인의 황금>은 네 작품의 출발점이다. 라인강의 황금에서 시작해 반지가 만들어지고, 그 반지를 둘러싼 욕망과 저주가 이후 세 작품 전체를 관통하게 된다. 결국 올해의 한 작품이 4년에 걸친 거대한 이야기의 첫 장인 셈이다. 나에게는 더욱 특별하다. 오래전 클래식바움에서 나흘 동안 영상으로 보았던 <반지>를 이번에는 실제 공연장에서 다시 만났고,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가는 4년간의 <반지> 여정을 처음부터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그너에 관심 없어도, 반지 이야기는 관심 있는 분이 많을 텐데, 이 참에 4년간의 반지 시리즈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독자 분들은 한번 시도해 보시길 응원 드린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금년도 첫 번째 작품인 <라인의 황금> 공연 일이 10월 29일(목)~11월 1일(일)인데, 이 기간은 창원에서 진행될 우리 대한내분비학회 추계학술대회 일정이랑 딱 일치한다. 11월 1일은 오후 공연인데, 호주내분비학회 참석을 위해 11월 1일 새벽 비행기로 출국하게 되어 있어 공연 참석이 어렵게 되었다. 일찌감치 비싸지 않은 등급의 좋은 좌석으로 예매해 놨는데, 무척 아쉽고 속상하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