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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zine No.44 | 제18권 2호 <통권68호>

2025년 여름호 대한내분비학회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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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아트 라이프 (2):
모리스 라벨과 볼레로(Boléro)

박이병

박이병 가천대학교 길병원 내분비대사내과

팝 음악과 클래식 음악 중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었던 작품은 무엇일까? 현재까지 음원 저작권료로 받은 순수 비용을 계산해 보면 수익 1위는 조지 윈스턴의 <캐논>, 2위는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이다. <캐논>곡이야, 수도 없이 들어봐서 알고 있지만, 모리스 라벨은 누구지? 그런 작곡가가 있었나? 하고 처음 들어보는 분들은 계실 듯한데, 라벨을 몰라도 그의 작품 <볼레로>는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어떤 곡인지 먼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어보자.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협주곡 (다비트 라일란트 지휘)

한 개의 주제 음이 169번 반복되고, 관악기와 금관악기의 솔로 파트가 있어서 아차 하는 순간 실수할 수 있는 곡이다. 작은북(snare)의 경우, 처음부터 15분 이상 똑 같은 박자로 연주해야 하므로, 작은 북에는 난이도 최상의 작품이다. 대부분의 연주회에서는 작은북이 한 대 등장하지만,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파리 초연 때와 같이 2대가 등장하는 게 이채롭다.

볼레로의 음원 저작권은 2016년 5월 1일 자로 소멸되었는데, 2년 전까지 벌어들인 음원 수입은 무려 730억원이라고 한다. 음원 하나만으로 730억 원이라~ 그야말로 ‘억’ 하는 곡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많이 듣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나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음원은 공짜이다. 작곡가가 이미 죽었을 뿐만 아니라 연주 악보 인쇄물 역시 이미 오래 지났기 때문에 아무나 무료로 연주하고 편곡해도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볼레로 곡의 수익을 챙기는 사람은 라벨도 아니고 그의 동생도 아니고 그의 가정부도 아닌, 모 업체라는 사실을 접하고 나면 씁쓸하기만 하다. 조금 더 설명하면, 볼레로가 세상에 나온 지 약 4년 뒤인 1932년에 라벨이 큰 교통사고를 당해 언어장애와 기억장애 등을 겪게 된다. 의사들은 라벨의 머리에 뇌종양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라벨은 수술을 받기 싫어서 미루고 있던 와중에 친구인 미국 작곡가 조지 거슈인이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갑자기 사망하는 소식을 접한다. 라벨도 거슈인처럼 더 나빠지기 전에 수술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애석하게도 교통사고와 수술의 후유증으로 6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가족도 없으므로, 그의 수많은 유산이 동생 에듀아르 라벨에 귀속되지만 그도 얼마 안 가서 죽게 된다. 동생도 가족이 없었으므로 죽기 직전까지 본인을 간병해 준 알렉산드르 타베른 간호사에 유산을 남기지만 그녀도 곧 죽게 되면서, 남편인 장 자크 르무안 변호사에게 상속되고 그도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하면서 유산의 80프로를 프랑스 라벨 재단 기부하지만, 여차여차해서 여러 번의 법정 소송을 거쳐 이 음원의 소유권은 결국 프랑스의 듀랑 출판사에 귀속되어 최근까지도 음원 수익을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외에 조금 더 복잡한 재산 싸움이 있지만, 이 정도로 알아보는 게 좋을 거 같다.)

디지몬 어드벤처의 한 장면

볼레로를 한 번쯤 들어 봤을 텐데, 어디서 들었을까? 아시는지? 90년 키즈이면 누구가 봤을 애니메이션 영화 <디지몬 어드벤처>에서 디지몬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들었을지도. 여기서 그 장엄한 분위기를 느껴보자.

영화 <밀정>의 송강호가 복수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볼레로

장엄하기도 하고,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벅찬 장면에 뜨거운 호르몬이 느껴지는 이 음악. 또한 최근에 상영된 영화 <밀정>에서도 송강호의 복수 장면에서도 이 음악이 흐른다.

이외에도 많은 작품에서 영화나 드라마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어서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참에 최근에 공개된 볼레로의 자필 악보를 살펴보자. 초반에 오로지 작은북만이 하나의 선율을 제일 작은 소리로 연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게 시작한 소리가 점점 커지고 커져서 합쳐지고 결국에는 거의 모든 악기가 어우러져 거대한 소리를 내면서 끝나게 된다.

볼레로(Boléro) 자필 악보의 첫 페이지

발레리노 Nicolas Le Riche,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

<볼레로>라는 곡은 원래 스페인 혹은 쿠바의 춤곡 중의 하나이다. 1920년대 유명한 여성 안무가이자 발레리나인 이다 루빈슈타인 (Ida Rubinstein)이 본인의 무용을 위해 모리스 라벨에게 작곡해달라고 해서 세상에 나온 곡이다. 거대한 원판 위에 원시적인 발레리나 한 명이 홀로 무용을 시작하며 주변의 다른 무용수들이 차차 음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무용인데, 저는 이 작품보다는 1950년대 혁신적인 안무를 이끈 스위스의 유명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 무용곡을 들어보고 싶다. 남자 발레리노의 엄청난 춤과 긴박감, 정확성, 그리고 마지막에 터지는 강력한 한방. 연구와 연구, 교육 등으로 바쁘시겠지만 15분 정도의 짬을 내어 들어보시길 강력 추천드린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금년은 라벨의 탄생 150주년이다. 그러다 보니 금년만큼은 라벨의 음악이나 관련된 작품을 많이 접할 거 같다. 저 역시 금년에 라벨 작품을 연주하는 공간에는 가급적 가보고 있다. 얼마 전 부천아트센터에서 신임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Adrien Perruchon) 취임 연주회에 다녀왔지만, 연주되었던 볼레로가 썩 좋지 않아 소개해 드리고 싶지는 않다.

우리의 조성진도 금년 1월 라벨 음반을 발매하고 전국 투어를 시작할 예정이다. 저는 티켓팅을 시도하기도 전에 클릭도 못해보고 전석 매진된 것으로 보고 너무 아쉬웠다. 티켓팅에 성공하신 수많은 관람자분들, 혹시 남는 티켓 있으시면 저한테 양도해 주시길~ㅎ (장소 불문하고 어디든 달려갑니다.) 지난 4월에 볼레로의 탄생 비화를 소개하는 영화도 나왔는데, 시간이 되시는 분은 이거라도 관람 하시길 추천드린다. 다소 지루하기는 하지만, 볼레로의 모든 것을 알아보겠다는 의지만 있으시면 어느 정도의 만족을 느끼실 만한 영화 같다.

영화 <볼레로> 포스터

흔히들 클래식 음악은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한다. 하지만 클래식 명곡은 오래전에 작곡되었어도 한두 번 연주되고 없어지지 않는다. 대중가요는 일정 기간 수없이 연주되고 즐기다가 유행이 다하면 스르륵 우리의 기억 속에 사라지는 곳이 부지기수이지만 클래식 음악은 200-30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연주되고 사랑받고 있다는 게 클래식 음악의 강점이다. 저의 경험을 돌이켜봐도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것 같다. 지난 30여 년 동안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은 실연으로 거의 50번 이상 들은 것 같고, 라디오나 음반을 통해 들은 횟수는 100회 이상이고 음반도 지휘자 별로 15여 개 이상 갖고 있다. 요새는 유튜브 영상의 화질이 좋아서 굳이 음반을 꺼내어 들을 일 없지만, 가끔은 오래된 음원을 찾아 듣는 것도 나의 행복을 찾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녹화를 하기 싫어해서 음원이 거의 없는 지휘자 <첼리비다케>의 1930년대 음원으로 합창교향곡의 3악장을 따로 들어보는 것은 저만의 추억놀이이기도 하다.

대전아트센터와 아트센터인천이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전국 곳곳에서 클래식 전용 홀이 오픈하고 있다. 2년 전에는 부천아트센터가 개관했으며, 올해 5월에는 부산아트센터가 개관을 하고 시범연주회를 진행한 바 있다. 부산아트센터는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의 공연장인 만큼 우리나라 최고의 클래식 공연장이 되겠다는 부산시의 포부와 미래 청사진을 보면서 부산을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앞으로도 전국 곳곳에 더 많은 클래식 전용 공연장이 개관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