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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이야기- 맥주 아는만큼 맛있다
1편 : 맥주의 역사

일차임상진료위원회 윤석기 이사

  맥주의 역사를 더듬으면 유럽 근·현대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사회 경제사적인 의미가 보인다. 맥주를 이해하는 것은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혁명과 독재뿐 아니라 종교적 사건, 전쟁, 사랑과 예술의 뒤편에는 어김없이 맥주가 있다. 맥주를 사랑했던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럽 역사에 녹아있는 서민들의 맥주 이야기를 찾아가다 보면 여러분도 '악마보다 검고 사랑보다 쓴' 맥주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왕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은 '평등의 술' 맥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인류는 발아한 보리가 달콤한 맛을 내며 발효가 잘 된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았다. 맥주의 역사는 경작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다.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발효주이자 가장 대중적인 알코올이다.
  맥주는 역사는 기원전 4000년경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곡물로 빵을 분쇄해 맥아를 넣고 물을 부은 뒤 발효시키는 방법으로 맥주를 제조했다. 메소포타미아의 농부들은 정교한 관개 시설을 갖춘 비옥한 들판을 경작하여 대량의 맥주를 빚고 소비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맥주를 중요한 교역 상품으로 삼았다.맥주 판매에 관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규정도, 이런저런 거사에서 맥주가 큰 역할을 했다는 기록도 모두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왔다.

  같은 시기에 이 음료는 바빌로니아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식탁에도 올랐다. 바빌로니아에서는 함무라비 법전에 양조업이 법의 규제를 받기까지 하였음을 보여주는데, 108조에는 술집 주인이 맥주값으로 곡물 대신 더 많은 무게의 은을 받거나 곡물 가치에 비해 적은 양의 맥주를 빚으면 잡아가 물에 던진다고 적혀있다. 포도주를 마시는곳에 시와 철학이 있었다면, 맥주를 권하고 마시는 곳에는 거사가 함께 했다. 그래서 함무라비 법전의 그 다음 조항인 109조에는 자기 술집에 모여 음모를 꾸민 반역자들을 체포해 궁으로 데려가지 않은 술집 주인은 똑같이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의 벽화에 의하면 이집트 지역에서도 3000년경부터 맥주를 생산했고, 노동자의 임금을 맥주로 지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래서 이집트인들을 고대 세계사에서 술을 가장 즐겨온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현금이라는 뜻의 Cash 가 이집트어로 맥주를 뜻하는 Kash에서 유래된 것은 맥주 역사의 숨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파라오 치세의 이집트는 포도가 많이 나는 지역이어서 맥주를 거저 술꾼들이나 마시는 술로 취급했다. 맥주를 마신 술꾼들이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고 뒷골목에 구토를 해서 악취가 심하다는 불평불만을 많은 파피루스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문명이 전해지면서 그리스 인 역시 맥주를 너무나 야만적인 술이라 천대했다. 로마시대에 이탈리아의 따사로운 햇살아래 풍성하게 영근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신이 주신 선물이었으나, 맥주는 찬밥 신세였다. 로마에서 보리는 가축의 사료로나 쓰는 곡물이었기에, 그것으로 빚은 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맥주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로마군단에서는 명령을 어기거나 맡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군인에게 벌로 밀 대신 보리를 배급했다. BC 58-51년경에 카이사르가 집필한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켈트인들은 오크나무(참나무)로 둥근 통을 만든 뒤, 보리로 만든 이상한 술을 즐기고 있다"고 기술했다. 좀 솔직하게 썼다면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고, 창피하게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은 야만인들이 밤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마시면서 행복해했다. 그런데 그들이 오크통에 저장했던 것은 붉은 포도주가 아니라 말 오줌처럼 누렇고 싱거운 맛의 이상한 술이었다.' 태양이 준 선물인 포도로 만든 붉은 와인이 아니라 말 오줌 색의 밍밍한 술을 마시며 행복해하는 켈트족은 그가 보기에 미개인, 야만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켈트족은 뒤이어 유럽을 지배하게 된 게르만족과 함께 맥주 마니아였다. '훌륭한 사람의 집에는 반드시 맥주가 있어야 한다'는 격언이 있을 만큼 그들은 맥주를 사랑했다.

  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고 기아가 닥치면서 식음 문화는 주린 배를 채우는데 급급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AD 8세기에서 9세기초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는 영토확장과 전쟁승리의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데 저는 그의 탁월한 성공의 비결이 맥주라고 본다. 그는 한마디로 맥주 광이었다. 맥주를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전쟁터에도 맥주 오크통을 늘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큰 전투를 치르기 전이면 반드시 병사들과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셨고 카를 대제의 군대는 무서운 괴력을 발휘해 대승을 거두곤 했다. 맥주가 없었다면 승리도, 영웅도 없지 않았을까? 카를 대제는 로마에 버금가는 제국을 건설했다. 이슬람교를 믿었던 무어인이 점령한 스페인을 제외하고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위스, 체코, 폴란드, 헝가리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일했으며 서구 유럽의 틀이 이때 형성되었다. 로마제국의 전통과 영광을 계승한 신성로마제국을 세우고 유럽을 통일한 카를 대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국 곳곳에 수도원을 지어, 전쟁터에서 고생한 부하들을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을 동시에 가진 수도원장으로 파견하였고 30곳의 수도원에 맥주 양조 시설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 수도원에 세금으로 맥주를 징수하거나 일반 양조장에도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교회나 수도원에 소속된 학교에도 맥주를 공급했다. 성지순례가 활성화되면서 순례자들의 입을 통해 이들 수도원 맥주의 명성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스위스의 장크트 갈렌 수도원과 독일의 트라피스트 수도원 등이 맥주로 유명해진 수도원들로 이곳에서는 맥주뿐 아니라 와인과 치즈 제조기술도 전수되었다. 잉여 자본은 더 큰 자본을 낳게 되고, 카를 대제가 부여한 거대한 토지와 맥주 독점권, 귀족들이 기부한 재산으로 중세 수도원은 더 큰 부자가 되었다. 맥주 독점권은 황금을 만드는 연금술 이상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농민과 장인, 농노, 시민들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으며. 맥주보리를 추수해 운송할 때의 통행세, 홉을 넣어 삶을 때의 홉 사용세, 맥주를 여관이나 술집에 내다 팔 때 판매세를 내야 했다. 심지어 수도사들은 일반 양조장에서 생산된 맥주에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행사인 축성(祝聖)을 했는데, 이때도 세금을 내야 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스위스의 장크트 갈렌 수도원으로 현재에도 맥주 제조 관련 문서가 보관되어있고 이것은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도 등재 되었다. 맥주는 세금 덩어리였지만 와인과 비교하면 그래도 값이 쌌다. 농가에서도 맥주를 만들긴 했지만 뛰어난 양조기술을 보유한 수도원 맥주와 맛을 비교할 수 없었으며 서민들에게 수도원 맥주는 사치품이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활 속 사치품이었다.

  중세의 수도사들에게도 맥주는 없어서는 안될 것이었는데, 수도승들은 금식을 할 때 조촐한 식사를 제외하고는 40일간 굶어야했다. 다만 예외는 ‘흐르는 것’을 섭취할 수 있었는데, 고대에 먹던 맥주(액체 빵!)에서 힌트를 얻어 양조를 하기 시작한다. 맥주의 발효를 돕고 부패를 막기 위해 여러 풀들을 시험해 보다 나중에 홉을 넣으면서, 홉을 넣는 방식이 일반적으로 정착한다. 홉이 들어간 맥주는 넓은 지역에 오랫동안 유통될 수 있었다. 수도원에서 전수된 비법에 홉까지 첨가되자, 맥주는 더 큰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종교가 생활을 지배하면서 수도원에 재산을 헌납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수도원에서 하루 1갤런(3.78리터)의 맥주를 배급받았다. 그들은 서민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맛있는 맥주 한 잔과 비스킷 한두 조각으로 해결하는 아침은 서민들에게 꿈의 식사였기에, 당시 맥주는 영양가 높은 수프처럼 인식되었다. 술이 아니라 액체로 만든 빵이었고 서민들의 소원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16세기 벨기에의 풍속화가 피테르 브뢰헬의 그림을 보면 술 취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단순히 취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신을 잃고 큰 대자로 드러누워 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취해 뻗어 있다. 농가 결혼식이나 세례식, 축제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맥주였다. 누구나 흠뻑 맥주를 마시고 취하고 싶어 했고 신은 외로움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맥주를 만들어 위안을 받았다. 낮에는 각종 세금과 영주들이 요구하는 노역에 시달리고, 밤이 되면 폭력이 난무했던 시대에 맥주는 서민의 큰 축복이었다. 프랑스 북부 코르비(Corbie) 수도원에서는 돈을 주고 맥주를 사 마실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형제 맥주'라는 이름으로 맥주 두 잔을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고 취하는 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고. 맥주 한잔을 얻어 마실 수 있다면 영혼도 팔 정도였다. 도시가 성장하고 화폐경제가 도입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숙소와 맥줏집이 문을 열게 된다. 자본의 축적은 경제적인 여유를 낳고, 경제적인 여유가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평등의 시대, 서민의 맥주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후 19세기에는 산업화로 인해 양조 공정이 기계화 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 인기있는 음료는 하나의 이정표를 찍게 되고 이후로 얼마의 과학적 발견이 있게 되는데, 프랑스의 미생물 학자인 루이 파스퇴르는 맥주의 발효를 일으키는 효모가 살아있는 유기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발견으로 당을 알코올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더 정밀하게 제어하는 일이 가능해 지게 되었고, 이어 덴마크의 식물학자인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은 평생동안 여러 종의 효모를 연구하고 분류하였고, 이 일은 양조용 효모의 균주를 배양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고 양조 산업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된다. 그 이후 여러 세기가 지나면서 양조기술은 많은 변화를 거쳤으며, 오늘날 경쟁 사회에서는 양조장마다 차이가 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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